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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리뷰 블로그</title>
    <link>https://dyalreview.tistory.com/</link>
    <description>dyalreview 님의 블로그 입니다.</description>
    <language>ko</language>
    <pubDate>Tue, 16 Jun 2026 05:04:27 +0900</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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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tl>100</ttl>
    <managingEditor>니라잡채양념</managingEditor>
    <item>
      <title>케인 파슨스 영화 &amp;lt;백룸&amp;gt; 리뷰</title>
      <link>https://dyalreview.tistory.com/3</link>
      <description>&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영화 &amp;lt;백룸&amp;gt;을 봤다. 공포 영화는 오랜만에 보는 것 같다. 백룸이라는 콘셉트 자체가 시각적 경험에 기반을 둔 것이니까 영상미는 당연히 아름다울 것이라고 예상했고 그 기대가 들어맞았던 반면 각본은 전혀 기대하지 않았는데 생각보다 기승전결의 구성이 탁월해서 놀랐다. 스토리상의 큰 줄기랄 것이 없으니 중간 부분이야 무엇으로 채우든 상관없는 영화였지만 여기에서 시작해야 하지 않을까 싶은 지점에서 시작하고 여기에서 끝나야 하지 않을까 싶은 지점에서 끝나서 좋았다. 마지막 장면의 영상미와 엔딩 크레딧에서 흘러나오는 매혹적인 음악이 모든 것을 미화시킨다......&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접은글 안에는 영화의 줄거리와 내용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다.&lt;/p&gt;
&lt;div data-ke-type=&quot;moreLess&quot; data-text-more=&quot;더보기&quot; data-text-less=&quot;닫기&quot;&gt;&lt;a class=&quot;btn-toggle-moreless&quot;&gt;더보기&lt;/a&gt;
&lt;div class=&quot;moreless-content&quot;&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amp;lt;백룸&amp;gt;은 트라우마가 있는 정신의학자 메리와 알코올 의존으로 어려움을 겪는 가구점 사장 클락, 두 사람의 체험담을 중심으로 하는 더블 주인공 구성이다. 영화가 시작하기 전에 어느 단역 연구원이 촬영한 푸티지 호러 필름이 2~3분 정도 삽입되어 있는데다 메리의 아역이 나오는 회상 씬도 잠깐 등장하기 때문에 정확한 주인공이 누구인지를 알아채고 따라가기 시작하는 시점이 좀 늦어지게 된다. 본격적인 스토리로의 진입을 알리는 도입부는 메리와 클락의 상담 장면이다. 메리는 클락이 제대로 된 인간관계를 맺지 않으며 그의 삶이 반복되는 루틴에 갇혀 있다는 것을 짚어 준 후 그가 아내와 이혼한 날의 경험을 재현하는 역할극 심리치료 기법을 제안한다. 그러나 클락이 화를 참지 못하고 아내 역할을 하는 메리에게 고성을 지르는 바람에 상담 세션은 좋지 않은 분위기에서 끝을 맺는다.&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이후 클락은 자신의 가구 판매점으로 돌아와 직원들의 도움을 받아서 자신의 가구점을 선전하는 TV 광고를 녹화하려고 한다. 이 광고 영상은 억지스러우며 마지막에는 NG까지 발생한다. 프롭으로 사용했던 의자가 부서진 것이다. 클락의 직원 보비는 광고의 컨셉이 해적인지 술탄인지 모르겠다고 구시렁거리다가 클락에게 눈총을 받는다. 그러나 당연하게도 이 두 가지 컨셉은 서로 충돌하지 않는다. 클락의 가구점이 모티프로 하는 술탄국 오스만 제국은 숱한 정복 전쟁으로 영토를 확장하여 유럽의 심장이었던 로마를 멸망시킨 것으로 유명하다. &quot;It's a Steal!&quot; 가구점에 걸려 있는 광고 문구다. 여행자이자 침략자이며 정복자이고 이방인이라는 점에서 오스만의 지배자는 해적과 다를 바 없는 존재다. 영화가 상징을 활용하는 방식은 초반부터 이처럼 직관적이다. 우리가 아는 백룸이 인간의 이해의 영역 밖에 있는 실체라는 개념에서 출발한다는 점과 상반된다.&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클락의 가구점 운영은 순탄치 않아 보인다. 그는 자신이 찍은 영상과 달리 매끄럽고 컨셉에 충실한 경쟁사의 광고를 TV로 보며 분노를 삼키고, 엄청난 전기요금과 툭하면 일어나는 정전 문제를 해결하고자 수리 기사를 부른다. 이때 클락이 알게 된 것은 차단기에 어디로 연결되어 있는지 알 수 없는 전기 스위치가 달려 있으며 여기에 연결된 무엇인가가 지나친 전력 소모의 원인일 수 있다는 것이다. '그가 미처 자각하지 못하는 사이 그에게 들러붙어 그의 에너지를 갉아먹고 있는 것'의 정체는 무엇이란 말인가. 점내에서 계속된 원인불명의 정전에 완전히 진력이 난 클락은 '어느 불면의 밤'에 그것을 제대로 탐구해야겠다고 결심하고 가구점을 탐사하다가 '백룸'의 출입구를 발견한다. 이 출입구는 신기하게도 여타의 공포물에서처럼 진입 이후 사라져 탐색자를 공황에 빠뜨리지 않는다. 언제나 그곳에 있으며, '원하기만 한다면 누구나 드나들 수 있다'. 하지만 이공간에 너무 깊이 빠져들어 '한번 길을 잃으면 나오기 쉽지 않다'. 묘사 하나하나가 영화 속의 백룸이 인간의 내면이나 무의식과 상통한다고 노골적으로 외치고 있다. 그래서인지 클락은 자신의 가구점 지하에 엄청난 규모의 비밀 방이 도사리고 있는 초유의 사태에도 별 망설임 없이 공포영화 주연의 본분을 지키며 백룸의 내부를 적극적으로 탐사한다. 그런데 여기에서 기이한 부분은 그가 시종일관 누군가를 찾는다는 점이다. 클락이 들어가는 방들 중 어디에도 사람이 살고 있을 것 같은 흔적은 보이지 않으며 볼품없는 잡동사니가 가득 엉켜 있을 뿐인데 그는 방과 방 사이를 헤매 다니며 여기 사람 있냐고 불러댄다. 실체 없는 검은 그림자 괴물이 배회하는 인기척을 느끼자마자 아무것도 하지 않고 출구를 찾아 달려나갈 거면서 말이다.&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백룸에서 나온 클락이 가장 먼저 하는 일은 백룸 안에서와 마찬가지로 사람을 찾는 것이다. 그는 우선 메리를 찾아가 자신의 경험을 설명하고, 메리가 자신을 믿어주지 않는다고 의심하자마자 화를 내며 증거를 가져오겠다고 떠나 버린다. 다음으로 그는 탐사를 도와달라고 가구점 직원 캣과 보비를 집에서 끌어낸다. 이 장면에도 약간의 위화감은 존재한다. 세계의 비현실적인 이면을 처음 마주하는 클락 같은 주인공은 통상 자신의 모험담을 남들에게 이해시키려 '이런 소리를 들으면 당신은 제가 미쳤다고 생각하시겠지만&amp;hellip;&amp;hellip;' 등의 대사로 운을 뗀다. 그러나 클락은 자신의 말을 남들이 상식적으로 받아들일 수 없으리라는 걸 잘 알아야 할 텐데도 다짜고짜 믿기 힘든 경험을 타인 앞에 들이대기만 한다. &lt;span style=&quot;caret-color: auto; letter-spacing: 0px;&quot;&gt;백룸의 존재를 꺼리고 두려워하기는 하지만 곧바로 납득할 수 있었던 것은 그곳이 클락의 집이며, 클락의 소유물이기 때문일까? 간단한 탐사만으로 쉽게 백룸의 지도를 그려낸 뒤, 하필이면 정신의학자에게 이토록 사적이고 폭력적인 공간을 거리낌없이 열어 보여준 뒤 그 내용물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여 달라고 강요하는 것은 그가 자기 무의식을 설계한 건축가이기 때문일까?&lt;/span&gt;&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다시 영화 도입부의 상담 장면으로 돌아가자. 메리는 클락에게 당신이 혼자라고 말한다. 클락은 자신이 타인에게 위험을 가져다준다고 실토한 후, 지금도 몇몇 사람들과 교류하고 있으며 외로움을 느끼지 않는다고 대꾸하지만, 메리는 외로움을 느끼지 않는 것과 혼자인 것은 다르다는 것을 지적한다. 다른 사람들을 백룸으로 끌어들이는 시점에서야 클락은 이 말의 의미를 이해했을지도 모른다. 몇 개의 익숙한 공간을 거치고 나서 그는 그가 다름 아닌 자기 자신의 내면에 진입했다는 것을 쉽게 알아차릴 수 있었을 것이며, 끝도 없이 이어지는 장소들 사이에서 조력을 구할 사람이라고는 한 명도 발견하지 못하고 단지 실체 없는 불안만을 마주했을 때 그는 비로소 자기 내면 세계의 자폐성을 실감했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그 안에 누군가를 들이지만, 자기 자신의 최초 발견자가 그 자신임에도 그는 스스로를 해설하기를 완강히 거부하며 오히려 타인이 주도성을 가지고 자신을 탐색하기를 요구한다. 그러나 클락이 끌고 온 캣과 보비는 세계의 폭력성을 견디지 못하고 사라진다. 보비는 괴물에게 끌려가 핏자국을 남기고 실종되며 캣은 그 괴물을 피하기 위해 백룸 사이를 헤매다 클락을 발견하고 숨겨달라고 절규하지만, 이상하게도 클락의 눈에는 캣이 보이지 않는다. 기이하게도 캣의 눈에는 클락이 있는 공간이 통유리처럼 비쳐 보이는 반면 클락의 눈에는 막힌 벽밖에 들어오지 않았던 것이다. 결국 노란 벽지 위를 하릴없이 더듬던 클락은 등 뒤에서 기어오던 괴물과 눈이 마주치고 만다.&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클락의 실종 이후, 메리는 클락의 행방을 알아내기 위해 차를 몰고 그의 가구점으로 향한다. 영화를 이끌어나가는 주된 인물이 클락에서 메리로 옮겨가는 이 시점은 영화의 전반부와 후반부를 가른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최근 심리치료 서적을 펴낸 메리는 저서를 선전하는 광고에서 인간의 내면을 방에 비유하여 묘사하면서 마음의 창문을 열어 보라고 권유한다. 그런 메리의 어머니에게는 정신병력이 있다. 그녀는 창문을 열면 누군가가 침입할지도 모른다는 공포에 빠져 메리를 밖에 나가지 못하게 가둬 키운다. 메리가 살던 옛 집이 허물어질 때 그녀는 어머니와 나란히 양손을 콘크리트에 새겨 손자국을 만들었다. 그 손자국은 단단해져 도로에 남았다. 추후 공사를 틈타 가져온 것인지, 손자국이 남은 콘크리트 덩어리 일부는 메리의 자택에 보관되어 있다. 덩어리에 단단하게 새겨진 손자국을 응시할 때 메리는 가끔 어린 시절로 되돌아간다.&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클락이 백룸의 존재에 대해 처음 설명했을 때 메리는 몹시 불안정해 보인다. 클락은 그녀가 자신의 이야기를 믿지 않는다고 단정짓지만, 그 생각과 달리 메리는 처음부터 백룸에 대해 무언가를 알고 있거나 적어도 짐작하는 듯하다. 메리는 어머니의 내면을 제대로 들여다보지 못한 것 같다. 회상 속에서 그녀는 어머니를 관찰하거나 응시하기만 하고 어머니에게 한마디도 하지 못한다. 그녀는 당시 어머니의 내면이 공포와 망상이 엉켜 지저분한 방 같은 상태였다는 것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어쩌면 그녀의 어머니도 백룸에 방문한 적 있었을지 모른다.&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백룸을 헤매던 메리는 직전 장면에서 괴물을 만난 후 행적이 묘연하던 클락과 재회한다. 그러나 클락은 정신이 조금 이상해진 것처럼 기묘한 반응을 하다가 메리를 납치해서 식당 같은 공간으로 데려간다. 이공간의 둥근 테이블에는 사람은 없고 이목구비가 기괴하게 비틀린 인형 같은 것들이 둘러앉아 있을 뿐이다. 클락은 그의 자기중심적이고 자폐적인 성격을 다시 한번 강조해 주는 대사 몇 마디를 내뱉고 메리에게 자기 앞에 앉아 자신의 아내를 연기하며 자신이 듣고 싶은 말을 해달라고 요구한다.&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혹자는 이 장면에서 사건 해결의 실마리를 읽을 것이다. 만약 백룸이 인간 내면의 투영이라면 백룸에서 탈출하기 위해서는 테라피 계통의 해결책이 필요하리라고 짐작할 만하기 때문이다. 이 영화가 &amp;lt;인사이드 아웃&amp;gt;이었으면 이쯤에서 메리가 응원이나 위로의 명대사를 줄줄 내뱉고 답답한 노란 방들은 창문이 달린 핑크빛 드림 하우스로 바뀌게 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영화는 공포 영화의 문법대로 전개된다. 클락의 행동에 어지간히 질린 메리는 너는 매사에 남 탓 하는 버릇을 고치지 않을 것이며 이 공간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고 변화하지도 못할 것이며 계속 똑같이 살 것이라고 일갈한다. 클락이 자신은 변화하고 싶지 않다고 하자, 메리는 그러라고 쏘아붙인다. 그 순간 해적 선장 차림새의 클락처럼 생긴 괴물이 나타나 진짜 클락을 죽여버리고 메리를 추격하기 시작한다.&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이건 여러모로 혼란스러운 장면이다. 일단 해적 선장 차림새의 괴물 같은 건 백룸과 어울리지 않으며, 백룸을 클락의 내면 세계로 이해한다면 백룸의 설계자이자 건축가인 클락이 어째서 백룸에서 비롯된 괴물에 잡아먹혔는지 설명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변화하고 싶지 않다는 클락의 대사가 일종의 직면을 통한 내적 성장을 뜻하며, 주인공이 성장하는 바람에 그의 악하고 파괴적인 일면을 상징하는 괴물이 그를 응징한 것일까? 아니면 그의 대사가 완전한 자멸을 선언한 것이고, 그 때문에 클락의 자아는 끝내 백룸에 잡아먹히고 만 것일까? 어느 쪽인지에 따라 영화가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극명하게 갈리게 될 텐데도 뒤이은 점프스캐어 씬과 추격전, 육탄전 등은 무섭기만 할 뿐 아무런 해답을 제공해 주지 않는다. 이후의 장면들은 메리가 해적 선장에게 쫓기는 과정으로 이루어져 있다. 끝내 선장을 따돌린 메리는 피투성이 몰골을 한 채 간신히 백룸을 연구하는 조사원들에게 발견되어 구조받는다.&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이후, 메리는 연구원 필과 마주 앉는다. 필은 오랫동안 백룸에 대해 조사해 왔으며 메리에게서도 백룸에 대한 정보를 얻어내려 애를 쓴다. 그는 이 연구가 어쩌면 인류 역사상 가장 가치 있는 활동일지도 모른다고 말한다. 이때에는 백룸과 인간의 내면을 연결하는 영화 오리지널 설정 대신 백룸의 원래 개념이 수면 위로 부상하게 된다. 이 설정에 따라 백룸은 클락의 내면 세계를 어느 정도 빌려왔을 수는 있지만 그의 내면 세계로 완전히 환원될 수는 없다. 클락 같은 지루한 남자의 자아를 탐구하는 것이 인류의 사명일 수는 없지 않겠는가? 그렇다고 인간의 집단적 무의식의 구현이 곧 백룸이라고 설명하는 것도 무리가 있다. 그랬다면 연구자로서 필이 메리에게 가장 먼저 물어보았어야 할 것은 백룸의 진입 경로가 아니라 메리가 탐험한 방들이 어떤 사람과 관련된 방인가 하는 점이었으리라. 그러나 백룸 연구 기관에서는 클락이 어떤 사람인지를 알고 싶어하기는커녕, 클락이 백룸 진입에 성공한 것을 일찌감치 알고 있었음에도 그의 신상 정보를 입수하려는 시도조차 해보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필이 메리에게 클락에 관해 물을 때 그의 이름이 아닌 사진을 바탕으로 질문했다는 것이 그 증거다.&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그러므로 영화에서 묘사된 것은 백룸의 지극히 단편적인 일면에 불과할 수밖에 없다. 설정상 백룸은 인간의 생멸과 무관하게 세계에 처음부터 존재해 온 완전한 미지의 영역, 숱한 탐구를 통해서도 결코 만족스럽게 규명되지 않았던 정체불명의 실체다. 어째서 영화에 등장했던 몇몇 방이 클락의 내면 세계를 닮아 있었는지에 대해서조차 영화는 명쾌하게 해설하지 않는다. 게다가 해적 차림의 괴물은 클락 자신의 에고나 욕망에서 비롯되었다기에는 클락 자신과 지나치게 불화한다. 초반부에서 해적 분장을 하고 광고를 찍는 클락은 외다리 선장을 연기하기 위해 멀쩡히 다리가 달린 무릎 위에 의족을 붙이고 우스꽝스럽게 걸으며 안쓰러울 정도로 숨을 헐떡인다. 구태여 상징적으로 해석하자면 그것은 의도적으로 자신의 가능성을 제한하며 스스로를 불구로 만들어 온 클락의 지난 삶을 뜻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클락이 자신이 지나온 삶을 벗어던지고 나아가는 대신 그 속에 눌러앉고 싶어한다면 그의 어두운 자아가 분열되어 그를 살해하고 싶어할 이유는 없어 보인다. 무엇이 클락을 죽인 걸까? 무엇이 메리를 위협한 걸까? 그것은 클락 자신으로부터 비롯되었을까? 혹은 백룸을 이루는 어떤 불가해한 미지의 법칙이 괴물을 생산해낸 걸까? 영화를 체호프의 총포상으로 만들겠다는 듯 모든 상징물을 노골적으로 활용하던 전반부에서와 달리 이 괴물의 정체에 대해서만큼은 명확한 답을 내리기 어렵다. 하지만 사실 그 점이 괴물의 등장을 허락한다. 백룸은 알 수 없는 세계이며, 괴물은 원본을 죽이고 살아남아 새로운 원본이 된 정체불명의 복제품이다. 그런 괴물이라면 나름대로 오리지널 백룸의 정신과 부합하지 않을까.&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필은 백룸에 대해 조금이라도 더 많은 지식을 얻는 것을 인생의 과제로 삼는다. 관객은 필의 과제를 수행하는 데 도움을 줄 수많은 단서를 수집했다. 하지만 현상을 규명하려면 인과가 필요한데, 우리가 가지고 있는 어떤 단서도 인과 관계를 암시하지 않는다. 백룸이 우리를 모방하는가, 우리 이전에 백룸이 있었는가. 영화 마지막에 등장하는 메리의 기억 속 소품들은 언제부터 백룸에 존재해 왔던 것일까. 우리는 백룸을 매개로 우리 자신의 내면에 들어가는 것일까, 아니면 우리의 내면이 처음부터 심리물이 아닌 실재물로서 세계 어딘가를 점유하고 있었던 것일까. 우리는 의식 세계의 주인이 우리 자신이라고 믿지만, 사실 우리는 결코 그 세계를 정복하지 못하며 속수무책으로 끌려다니고 잡아먹힌다. 우리의 내면 세계는 반짝 나타났다 사라지는 전기 신호의 집합체라고 믿지만, 그것은 악취 나는 빨래 더미와 뒤엉킨 가구의 형상을 하고 우리를 기다리고 있으며 그중 일부는 우리의 손에 들려 현실로 끌려나온다. 아니, 우리의 내면 세계에 대한 앎이 과연 백룸의 법칙을 설명해 주기는 할까? 건축가인 클락의 눈에 백룸은 장소로만 보인다. 그것은 방과 통로, 경사로와 문으로 구성된 거대한 설계물이다. 메리의 시선이 틈입한 뒤에야 백룸은 한 남자의 불안한 내면이 되었으며, 뒤이어 메리 자신의 내면이 되었다. 필의 연구에서 백룸이 무엇인지 우리는 배우지 못했다. 그가 대답을 거부했기 때문이다. 이렇듯 보는 사람에 따라 백룸의 의미가 달라지므로, 이 영화가 백룸이라는 세계를 어떤 식으로든 해설해 준다고 판단하는 것은 섣부른 일이다. 백룸은 인간의 지식 체계과 가치 체계 바깥에 있다. 그래서 클락은 백룸으로 침잠한다. 그는 백룸에 머무르는 이상 더 이상 변화할 필요가 없고 그저 존재하기만 해도 된다는 점에 매료되어 방을 떠나지 못하는 것인데, 이는 백룸이 수수께끼일 뿐 정답이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가 변화해야 하는 이유는 어딘가에 있는 정답에 가까워지기 위해서이다. 그러나 백룸의 세계에 있는 것들은 가치평가를 초월해서 그냥 그 자리에 있다. 어느 날 우연히 그곳에 흘러들어 온 인간이 방 하나하나를 돌아다니며 닥치는 대로 의미를 부여하려 할 수는 있겠지만, 그전까지 모든 것은 앉아 있든, 서 있든, 살인을 하든, 고장나 있든, 아무것도 안 하든 평등한 사물로서 존재한다.&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영화에 나온 장면들은 카메라로 찍은 기록들이 흔히 그렇듯 무한하게 뻗어 있는 세계의 극히 일부만 포착한다. 내면 세계를 주제로 던진 바람에 계속해서 인간의 심리에 초점을 맞추고 이것저것 생각하게 되긴 하지만 이야기가 끝났다는 느낌도 어떤 사실이 밝혀졌다는 느낌도 없어서 좋았다. &amp;lt;백룸&amp;gt;이라는 영화를 만들기로 했으면 감독이 달성해야 하는 일차적 목적은 유한한 화면에 무한한 세계를 구현하는 것일 텐데 그 점에 있어서 케인 파슨스는 나름대로 괜찮은 돌파구를 찾은 것 같다.&lt;/p&gt;
&lt;/div&gt;
&lt;/div&gt;</description>
      <author>니라잡채양념</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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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Sun, 31 May 2026 18:18:57 +0900</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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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tem>
      <title>다카기 아키미쓰 &amp;lt;문신 살인사건&amp;gt; 리뷰</title>
      <link>https://dyalreview.tistory.com/2</link>
      <description>&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amp;lt;문신 살인사건&amp;gt;을 읽었다. 초반에는 속도가 잘 안 나서 읽다가 꾸벅꾸벅 졸았는데 여느 추리소설이 그렇듯 어느 지점을 넘기고 나니 단숨에 결말까지 읽을 수 있었다. 1951년 소설이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비슷한 시대여서 그런지 요코미조 세이시 작품을 읽을 때 느꼈던 특징들이 그대로 들어 있었다. 장엄한 태도로 앞날의 비극을 예고하는 편집자적 논평이라든가. 전후의 혼란을 투영하는 듯 음울한 배경 설정에다 기괴하고 민속적인 분위기. 우연의 일치의 극적인 활용. 추리소설에 대한 지식이 얕아서 이런 작법을 정확히 누가 먼저 유행시켰는지는 모른다. 다카기 아키미쓰가 요코미조 세이시의 후발 주자인 것으로 알고 있기는 하다. 읽고 있으면 한편으로는 작가의 자의식과 오만이 문체에 너무 묻어나서 꼴불견이기도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특유의 전근대적인 정서가 맛깔나게 느껴지기도 한다. 따지자면 내 취향은 이보다는 세련된 쪽이지만 그건 내가 현대인이라서일 것이다.&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트릭은 어렵지 않다. 초반부터 대강 이러저러하겠거니 짐작할 수 있는 트릭이다. 작가가 함정을 설치한 부분이 다소간 허술하게 넘어간다는 티가 나기 때문에 50% 정도는 일찍 맞출 수 있으나 디테일하게 파고들면 헷갈리는 부분들이 있다. 하지만 군더더기 없으며 당대에는 나름대로 획기적인 것이었으리라고 생각된다. 나는 누구도 예상 못할 어마무시한 아이디어에만 좋은 점수를 주는 타입은 아니기 때문에 탐정이 본격적으로 추리를 피로하기 전에 내용을 예측하기는 했어도 꽤나 멋지다고 느꼈다. 무엇보다 괜찮은 소재를 골랐기 때문에 작품이 준수할 수밖에 없었다. 내가 정말 좋아하는 노리즈키 린타로의 &amp;lt;잘린 머리에게 물어봐&amp;gt;도 그랬지만, 소재 자체가 기발하고 생각할 거리가 많다면 설치된 트릭은 설령 평범한 레퍼토리라도 완전히 새롭게 다가오는 법이다. 좋은 소재를 고르고 자료조사를 열심히 한 작품은 좋다. 작품 해설에 따르면 다카기 아키미쓰는 원래부터 문신이라는 소재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는데 그만큼 고찰을 섬세하게 한 것 같다. 문신이 대중적인 패션으로 널리 받아들여진 것이 최근의 일이라 그런지 문신에 상당한 역사적 두께가 있으리라는 생각은 미처 하지 못했다. 우리가 흔히 고대 부족 사회 사람들을 생각할 때 연상하는 이미지가 얼굴에 얼룩덜룩 문신이 뒤덮인 모습인데도 말이다. 야쿠자가 하고 다니는 이레즈미가 어엿한 일본 전통 문화의 일부라는 생각도 해보지 못했고 문신이 예술적 가치를 지닐 수 있다는 생각도 하지 못했다. 그러나 작품에서는 문신의 이런 다양한 면모를 세심하게 설명한다. 그런 부분이 작품 곳곳에 섬뜩한 생기를 불어넣어 준다. 하지만 문신을 한 여성을 묘사할 때의 페티시적이고 대상화적인 태도는 역시 싫다. 이거야말로 이야미스라고 느껴진다. 그래도 그런 부분 역시 어느 정도 개연성을 불어넣는 장치라는 점에서 납득할 만하므로 요코미조 세이시에 비하면 양반이지만.&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이하의 내용에는 &amp;lt;문신 살인사건&amp;gt;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다. 보통이라면 우회적으로 쓰겠지만, 작품의 트릭에 대해 하고 싶은 말이 있기 때문에 트릭을 모두 밝힐 것이므로 열람에 주의.&lt;/p&gt;
&lt;div data-ke-type=&quot;moreLess&quot; data-text-more=&quot;더보기&quot; data-text-less=&quot;닫기&quot;&gt;&lt;a class=&quot;btn-toggle-moreless&quot;&gt;더보기&lt;/a&gt;
&lt;div class=&quot;moreless-content&quot;&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작품의 서두에서는 에도 시대부터 이어진 문신의 역사와 예술성에 대한 찬미적인 설명과 함께 어느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는 문신을 두른 몸통 가죽에 독자의 이목을 집중시킨다. 훌륭한 문신사가 남긴 정교한 문신은 그 자체로 하나의 예술 작품이라 보아도 무방하나 사람의 몸에 새겨져 있는 것인 만큼 오래도록 남기는 어렵다. 그럼에도 생전에 원주인이 동의한다는 조건하에 시체의 가죽을 벗겨 보관하는 방식으로 전해져 내려오는 문신이 있는데, 그중 이 작품의 소재가 되는 것은 어느 여성의 등에 문신사 호리야스가 새겼던 걸작 &amp;lt;오로치마루&amp;gt;이다. 오로치마루란 이무기를 부리는 전설의 요술사로, 에도 시대 후기에 간행된 &amp;lt;지라이야 설화&amp;gt;에 등장하는 3인의 요술사 가운데 하나다. 이 오로치마루 문신을 새긴 여성은 1946년 여름 있었던 참혹한 연쇄 살인사건에 휘말려 목숨을 잃은 인물이었다.&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간과하기 쉽지만 이 첫 번째 장(章)은 서술 트릭을 구사하고 있는데 이 공들인 기교는 흡사 &amp;lt;애크로이드 살인 사건&amp;gt;이나 &amp;lt;그리고 아무도 없었다&amp;gt;의 첫 번째 장을 연상케 한다. 처음 읽으면 이 부분의 역할은 문신을 예술적으로 바라보는 시선을 소개하여 작품에서 문신에 탐닉하는 수집광 하야카와 박사의 집착적 태도에 대한 정당성을 부여하고, 어떤 연쇄 살인 사건이 벌어졌는지 독자의 궁금증을 유발하는 데서 끝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전지적 서술자 입장에서 사건을 해설하면서 독자에게 하나의 편견을 심어 주고 있는 것이다. 이 부분이 사실은 다소 허술한 작품의 핵심 트릭을 가동시키는 신의 한 수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나는 이 작품을 통틀어서 이 첫 번째 장이 가장 마음에 들었다.&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뒤이어 장면은 1946년 도쿄에서 열렸던 문신 경연대회로 넘어가는데, 훌륭한 문신을 몸에 새긴 각지의 남녀들이 옷을 벗어 아름다움을 뽐내고 겨루는 꽤나 기괴한 경연이다. 이 대회의 여왕은 앞서 이야기된 &amp;lt;오로치마루&amp;gt; 문신을 새긴 여성, 노무라 기누에였다. 그는 호리야스의 세 자녀 가운데 둘째 딸로, 대회를 계기로 주인공 미쓰시타 겐조를 알게 되어 그와 하룻밤을 보낸 후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해준다. 사실 호리야스의 삼남매는 절대 한 사람에게 새겨서는 안 된다는 세 개의 문신을 나누어 새기고 있다. 호리야스는 기누에의 오빠 쓰네타로에게 두꺼비 요술사 &amp;lt;지라이야&amp;gt;를, 쌍둥이 여동생 다마에에게는 민달팽이 요술사 &amp;lt;쓰나데히메&amp;gt;를 새겼는데 이들은 가위바위보처럼 셋이 모이면 서로가 서로를 죽여버린다고 해서 문신사 사이에서는 공존해서는 안 되는 금기라는 것이다. 기누에는 미쓰시타에게 자신들이 나온 세 장의 사진을 보여주고, 다른 남매들은 전쟁통에 일찍 죽어 버렸고 문신의 저주에 의해 자신에게도 위험이 닥칠 것 같다며 미쓰시타를 불러낸다. 그러나 도착한 미쓰시타가 발견한 것은 일본 가옥의 욕실에 쓰러진 기누에의 얼굴을 한 토막 시체로 그중 몸통의 &amp;lt;오로치마루&amp;gt;가 절단 나 사라져 있었다.&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추리소설의 문법에 익숙한 사람이라면 여기까지의 줄거리만 보고도 쉬이 예상할 수 있듯 이 작품은 시체 바꿔치기 트릭을 사용한다. 미쓰다 신조의 &amp;lt;잘린 머리보다 불길한 것&amp;gt;에서 추리소설가 에가와 란코는 머리 없는 시체 사건을 나누는 11가지 분류를 소개하는데, 그중 하나는 신체에 나타난 두드러진 표식을 숨기기 위해 시체를 절단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대체로 이론상으로만 고려되는 가능성이다. 보통 등장인물이 특이한 신체적 표식을 가진 것에 개연성을 부여하여 트릭을 만들어내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문신이라는 소재를 차용하는 것은 이런 난관을 상당히 세련되게 극복하는 방법이라 할 수 있겠다. 문신이 담긴 몸통을 가져간 이유가 무엇일까. 문신의 아름다움에 탐닉하여 숨겼다는 것은 너무 일차원적인 생각이다. 어떤 문신이 새겨졌는지를 모르게 만들려는 것이 다음으로 떠오르는 후보다. 그러나 죽은 것이 &amp;lt;오로치마루&amp;gt;를 새긴 기누에가 아니라 &amp;lt;쓰나데히메&amp;gt;를 새긴 쌍둥이 여동생 다마에임을 숨기고자 했다는 가설은 작품 속에서 일찍이 기각된다. 기누에가 건넸던 사진 속에서 다마에는 팔 위까지 커다란 문신을 새겼는데 발견된 시체에서 그 부분은 문신 없이 깨끗했기 때문이다. 이후 죽은 것이 다마에가 아닌 기누에임은 계속 작품 속에서 기정사실처럼 취급된다.&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그러나 해답은 사고를 한번 더 비틀어야 찾을 수 있다. 기누에가 미쓰시타에게 보여주었던 사진은 사실 가짜였다. 다마에의 사진이라고 주었던 쓰나데히메는 진짜 문신이 아닌 피부에 그린 그림에 불과했던 것이다. 잘 아는 사람이 아니고서야 알아볼 수 없는 차이였다. 그러니 문신이 담긴 몸통을 가져간 이유는 신체에 나타난 두드러진 표식을 숨기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런 표식이 없음을 숨기기 위해서였다. 다마에의 몸통은 깨끗하다. 이를 비밀로 하기 위해 몸통은 사라질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기누에는 살아있었고, 사건의 공범이었지만, 작품 말미에 그와 공모하여 연쇄 살인을 일으킨 진범에게 총을 맞아 살해당한다. 결국 기누에의 오로치마루 문신은 일련의 사건 끝에 온전히 남으며 기념으로 몸통 부분만 잘린 가죽이 보관되어 전시된다. 여기가 서술 트릭이 작동하는 지점이다. 첫 장을 읽고 독자는 오로치마루 문신을 새긴 이와 연쇄살인의 시초로서 몸통 없이 발견된 여자가 동일인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그렇기에 다마에의 문신이 더 크다는 이유로 다마에 피해자설이 중간에 기각될 때 별 의심 없이 동의하게 된다. 죽은 것이 기누에임은 이미 작가와 합의한 부분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멋진 심리 트릭이었다.&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이러한 기교에 더해 문신이라는 소재가 가진 흥미로운 속성이 트릭에 한 겹의 견고함을 더한다. 문신은 영원하면서도 찰나적이다. 몸의 한 부분에 문신을 새긴다는 것은 돌이킬 수 없는 흔적을 남기는 것이다. 그것은 쉬이 지워지지 않고 낙인처럼 소유자를 따라다닌다. 사실 한때에는 실제로 문신이 낙인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문신을 한 여성 캐릭터는 여성의 무결함에 대한 사회적 요구와 배치되기에 좋지 않은 시선이 따라붙기도 하고 페티시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현대에도 많은 사람들이 어릴 적 철없이 새겨 넣은 문신을 후회한다. 다른 것으로 덮거나 지우려 애써도 온전히 사라지지는 않는다. 그러나 소유자가 사라지면 문신은 사라진다. 문신을 하고 죽은 사람이 땅에 묻힐 때 문신도 땅에 묻히며 그것은 곧 썩은 살점들과 굳은 혈액과 함께 흙으로 돌아간다. 일반적으로는 그렇다.&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그러나 이 작품에서는 그 두 가지가 뒤집힌다. &amp;lt;쓰나데히메&amp;gt; 문신은 소유자와 불가분의 것이 아니라는 점에서 찰나적이다. 그것은 바늘로 새겨 넣은 것이 아닌 가짜이기 때문에 순식간에 지워진다. 모두가 문신이 빼곡히 그려진 사진 속의 신체가 영원히 그 주인을 따라다닐 것이라고 예상했으나 그것은 착시에 불과했다. 그러나 &amp;lt;오로치마루&amp;gt; 문신은 소유자와 함께 죽지 않는다는 점에서 영원하다. 기누에는 죽어 우리 곁에 없지만 문신은 예술 작품으로서 우리 곁에 남는다. 작품 초반부, 아직 대외적으로도 살아 있을 무렵의 기누에는 &amp;lt;사람은 죽어 가죽을 남긴다&amp;gt;라고 농담한다. &amp;lt;호랑이는 죽어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 이름을 남긴다&amp;gt;라는 속담을 뒤집은 것이다. 그는 실제로 가죽을 남겼다. 그러나 사람답게 이름을 남기지는 못하고 오로치마루 문신을 한 어느 여성이 되었다.&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어떤 면에서 문신의 속성은 추리소설에 나오는 범인의 죄를 연상케 한다. 덮고 감추려고 애를 써도 영원히 소유자를 따라다닌다는 점에서. 죽어서라면 해방될 수 있을 것 같지만 꼭 그렇지도 않다는 점에서.&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여성임에도 거리낌 없이 커다란 문신을 온몸에 새길 만큼 대범하고 도발적인 여자로 묘사되는 기누에는 트릭을 구사해 동생을 죽였다. 범행 동기는 연인이 유산을 상속받게 하기 위해서였으나, 겨우 그런 것 때문에 동생을 죽인다는 것은 사실 지나치다. 작품 속 탐정은 후반부에 유력 용의자로 몰렸던 하야카와 박사, 그리고 철통 같은 알리바이를 지니고 있던 진범과 각각 장기를 두며 두 사람의 성향을 탐색하는데, 이 장면은 에르퀼 포와로가 용의자들의 브리지 게임 전적을 토대로 범인을 추론해 내는 &amp;lt;테이블 위의 카드&amp;gt;의 추리를 떠오르게 한다. 장기에서 과감한 승부수를 던지는 도박사적 성향이 대담한 범죄를 계획하게 했으리라고 추론하는 탐정의 심리 분석은 그럴듯하고 납득할 만하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공범 기누에의 심리에 대해서는 너무나 실망스러운 설명밖에 주어지지 않는다. 동생에 대한 질투나 기누에의 여러 가지 성격적 특성을 언급하다가 여자의 마음은 알기 어렵다는 식으로 어물쩍 넘어가 버릴 뿐이다. 이 부분을 옥에 티라고 느낄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사건 개요만 보면 기누에의 역할이 상당히 작위적이고 이상하기는 해도 의외로 기누에라는 캐릭터가 개연성을 해친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기누에가 그토록 자랑스럽게 여기는 문신과 그의 범행에 닮은 데가 있기 때문이 아닐까. 죽을 때까지 따라붙는 예술적인 불순물을 동경하며, 그로 인해 손가락질받더라도 개의치 않을 사람이라면 충분히 이런 살인을 저지를 수도 있을 것 같다.&lt;/p&gt;
&lt;/div&gt;
&lt;/div&gt;</description>
      <author>니라잡채양념</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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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omments>https://dyalreview.tistory.com/2#entry2comment</comments>
      <pubDate>Mon, 28 Jul 2025 14:54:43 +0900</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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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다카노 가즈아키 &amp;lt;13계단&amp;gt; 리뷰</title>
      <link>https://dyalreview.tistory.com/1</link>
      <description>&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amp;lt;13계단&amp;gt;을 읽었다. 즐겁게 읽었다.&lt;span style=&quot;letter-spacing: 0px;&quot;&gt;&amp;nbsp;사회파 미스인데 사회파를 읽는 게 너무 오랜만이라서 공정한 평가를 내릴 수 있었을지 잘 모르겠다. 정말 훌륭한 작품이라고 생각했지만, 근래 본격을 하도 읽어서 본격에 조금 질려 있어서 상대적으로 참신함과 세련됨이 부각되어 보였기 때문에 그렇게 느낀 측면도 조금은 있을지 모르겠다. 그래도 추천사에 따르면 이 작품이 에도가와 란포상 최초로 만장일치 수상이 결정된 작품이라고 하니 객관적으로도 걸작임이 입증되었다고 할 수 있다.&lt;/span&gt;&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사회파 작품이니까 테마가 되는 사회 문제에 대해서 이야기해야 할 것 같다. 이 작품이 다루는 주제는 흉악범의 사형이다. 우리나라는 사형제가 명목상으로만 존재하니 그다지 와닿지 않지만 일본에서는 연쇄 살인범의 사형은 나름대로 적극적으로 집행되고 있는 모양이다. 추리소설은 일상 미스가 아닌 다음에야 대체로 살인범을 단죄한다는 테마를 따르고 있으므로 꼭 이런 형태가 아니더라도 누구라도 한 번쯤은 건드려볼 만한 주제다. 범죄자의 처우를 결정하는 탐정의 권한 이야기는 소위 후기 퀸 문제의 두 번째 뿔이기도 하다. 엘러리 퀸의 어느 후기 작품에서 탐정 엘러리는 헛추리로 무고한 사람을 사형대에 서게 만들고 나중에야 그 사건에 진범이 따로 있음을 깨닫는다. 이후 엘러리는 진범에게 찾아가 자신의 추리를 들려주고 자살을 종용한다. 공권력도 재판관도 아닌, 작품 바깥에서야 주인공이지만 작품 세계 내에서는 민간인에 지나지 않는 탐정이 두 명이나 되는 사람의 목숨을 어이없게도 날려버린 것이다. 추리소설 향유자들은 대개 이런 스토리를 장르적 허용으로 넘겨버리지만 잘 생각해보면 탐정에게 이런 식으로 남의 생사를 좌지우지할 자격이 공짜로 주어지는 것은 뭔가 이상하다.&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amp;lt;13계단&amp;gt; 직전에 읽은 아리스가와 아리스의 &amp;lt;달리의 고치&amp;gt;에서는 이런 대목이 있었다. 살인범을 규탄하며 그가 반드시 붙잡혀 처벌받고 지옥에 떨어졌으면 좋겠다는 등장인물에게 탐정 히무라 히데오는 정말 살인범이 지옥에 간다는 보장이 있겠느냐고 묻는다. 크고 작은 허물을 안고 있는 일반인들은 대체로 그것이 지옥에 갈 정도로 큰 잘못은 아니리라고 믿는다. 그러나 살인범이 가지고 있는 죄의 무게는 어떻게 측정될까. 만약 살인범이 붙잡혀 처벌받으면 현세에서 충분한 죗값을 치른 것이고, 그렇게 죄를 상쇄시킴으로써 내세에서는 다른 일반인들과 동등하게 취급받게 될 수도 있다. 더 나아가 생각해보면, 선한 이들은 천국에 가고 악인들은 지옥으로 떨어지는 사후세계라는 게 정말로 있다면, 현세에서 살인범을 단죄하는 것은 주제넘은 일이라고도 볼 수 있다. 초월적인 신적 권능에 의해 이루어지는 심판이 이미 존재하는데 그것과 별개로 한낱 인간이 인간을 심판하겠다고 나서는 꼴이니 말이다.&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하지만 히무라 히데오가 내리는 결론은 사후세계나 전능한 신은 없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인간과 법의 심판이 가치를 지닌다는 것이다. 나는 무신론자로서 이런 생각에 공감한다. 내세에서의 심판과 현세에서의 심판, 둘 중 하나만 있으면 된다. 그러나 우리는 후자를 보장받지 못해서 전자를 만들었다. 우리가 선인은 보상받고 악인은 처벌받는 내세를 믿어야 했던 이유는 현세에서 잘못된 심판이 이루어질 것을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현세에서의 처우가 불완전할지도 모른다는 불안 때문에 우리는 공명정대한 최후의 상고심을 상상해낸 것이다. 하지만 그런 것은 없다. 실제로 우리는 신의 심판은커녕 끔찍하게 미덥지 못한 사법 제도 하나만 달랑 가지고 있을 뿐이다. 그래서 실제로는 부조리한 일들이 잔뜩 발생하고 해결책도 대체로 없다. 그것이 건조한 진실이다.&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amp;lt;13계단&amp;gt; 역시 이러한 진실 위에 쓰인 작품이다. 이하의 내용에는 &amp;lt;13계단&amp;gt;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다.&lt;/p&gt;
&lt;div data-ke-type=&quot;moreLess&quot; data-text-more=&quot;더보기&quot; data-text-less=&quot;닫기&quot;&gt;&lt;a class=&quot;btn-toggle-moreless&quot;&gt;더보기&lt;/a&gt;
&lt;div class=&quot;moreless-content&quot;&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상해치사죄로 수감생활을 하다 가석방된 주인공 미카미 준이치는 자신의 가족이 합의금 명목으로 피해자 유족에게 지불해야 했던 거액 때문에 막대한 빚에 시달린다. 미카미는 복역 당시 자신의 교도관이었던 난고 쇼지의 제안을 받고 상당한 보수가 걸린 사건 조사에 참여하게 된다. 그것은 기억상실증에 걸린 사형수가 연루된 잔인한 살인사건으로, 여기에서 미카미와 난고의 역할은 사건을 재조사해 정말로 사형수가 진범이 맞는지를 밝혀내는 것이다. 하필이면 사형수가 사건 당시의 기억을 완전히 잃은 탓에, 그가 살인을 저질렀는지 아닌지는 사형수 본인조차 모르는 상태로 정황 증거만으로 사형 판결이 내려졌던 것이다. 사형을 앞두고 본래의 판결을 뒤집을 만한 증거가 나타나면 상고심을 신청할 수 있겠으나 그런 기회가 없다면 무고한 사람을 범인으로 만들어 처형해버릴 가능성이 생기게 된다. 새로운 증거를 얻을 유일한 실마리는 사형수가 최근에 갑작스레 되찾았다는 기억, 어딘가의 계단을 오르는 기억뿐이다.&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등장인물들이 불확실한 증언을 토대로 사형수의 무죄를 밝힐 증거를 찾아다니며 분투하는 구성은 윌리엄 아이리시의 &amp;lt;환상의 여인&amp;gt;을 연상케 한다. 그러나 이 작품의 독보적인 부분은 모든 인물들의 행위 동기와 결과, 사건들의 발생 원인과 전개에 하나하나 일본 형법과 관련된 디테일을 얽어 넣었다는 것이다. 가석방된 주인공의 형이 결정된 과정, 기억을 잃은 용의자가 사형수가 된 과정, 미카미와 난고에게 사건이 의뢰된 이유, 유가족과 피해자 주변인의 탐문 결과, 사건의 진범과 범행 이유 등 모든 부분에 법률의 한 대목이 인용되어 있고, 법률이 이러해서 이 인물은 이렇게 행동했고 사법부는 이렇게 판단했으며 사건이 이러한 결과를 낳았다는 것이 모든 설명의 패턴이다. 마치 역학 법칙이 세계의 모든 결과를 지배하는 것처럼 법률이 작품의 모든 전개를 지배한다. 그러나 법률은 역학 법칙처럼 초월적이고 불가역적인 것이 아니라 인간이 작은 머리를 굴려 만들어낸 엉성한 것이다. 그렇기에 등장인물들은 자신들이 거대한 부조리 속에서 살고 있는 것은 아닌지 계속해서 곱씹을 수밖에 없다. 법률은 거듭 의도와 다르게 작동한다. 예컨대 주인공 미카미가 2년의 비교적 낮은 형기를 부여받는 데 큰 역할을 한 것은 그의 가방 안에 있던 칼이었다. 그에게 피해자를 살해할 적극적인 의사가 있었다면 칼을 흉기로 사용했을진대 칼은 구매한 그대로 포장조차 뜯지 않은 채 가방에 얌전히 들어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후반부에 미카미는 사실 정말로 그 피해자를 살해하려고 칼을 구매했었다는 사실이 밝혀진다. 미카미가 피해자와 구면이었고 그에게 원래부터 살의를 품고 있었기 때문에 평범한 가게에서 마주쳤음에도 불구하고 상해치사로 이어지는 큰 몸싸움이 붙었던 것이었으며, 칼을 꺼내지 못했던 것은 순전히 기회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미카미가 지닌 살의의 상징이었던 칼이 그에게 살의가 없다는 증명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는 그린 듯한 아이러니다.&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그러나 이 사법적 판단에 큰 문제가 있었던 것 같지는 않다. 가방에 버젓이 칼이 있는데도 맨손 싸움을 하다 상대를 죽여버린 살인자는 그 살인을 의도한 것은 아닌 게 틀림없다고 충분히 생각할 수 있다. 그렇다면 문제의 원천은 무엇일까. 아마 애초에 너무 어려운 판단을 해야 하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추리 소설이라는 장르가 시사하는 바와 달리 어떤 진실들은 그냥 붙잡을 수가 없기도 하다. 어떤 문제들의 답은 그냥 구할 방도가 없다. 타인이 무엇을 의도하는가 하는 문제가 정확히 그런 부류일 것이다. 우리가 남의 의도에 도대체 어떻게 다가설 수 있을까. 간접적 증거를 그러모으며, 도저히 뚫을 수 없는 타인의 외피를 만지작거리며, 그저 추측해 보는 수밖에 없다. 추측은 종종 빗나간다. 이토록 개인정보 침해가 심한 현대 사회에서 우리가 유일하게 지극히 개인적인 것으로 간직할 수 있는 단 한 가지는 우리의 심리 상태이다. 정말 사람을 죽이고 싶었는지, 왜 죽이고 싶었는지, 후회하고 있는지 아닌지. 그런 건 당사자 말고는 누구도 알 수 없으며, 가끔은 당사자도 알 수 없다.&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어떤 면에서 이 작품이 진짜로 말하고 싶었던 것은 인간의 심리라는 이 블랙박스에 대한 것일지도 모른다.&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사형제의 부조리에 대해 언급하라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무고한 이가 희생당할 우려다. 사형당하는 범죄자의 권리 때문에 사형제를 거부해야겠다는 생각은 그보다 후순위다. 현대적 국가의 사법 체계는 나름대로 신중해서, 갱생의 여지가 일체 없는 끔찍한 중범죄자를 고르고 골라 사형시킨다. 작품에서 사형수는 사실 무고했던 것으로 밝혀지지만, 그가 정말 유죄였다면 보편적 도덕감을 가진 대부분의 사람이 그가 사형당해도 싼 놈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가 저지른 것으로 기소당한 범죄는 노부부를 도륙 낸 엽기 살인으로, 내장과 안구가 튀어나와 시신도 수습할 수 없을 정도로 끔찍했다. 그런 살인자에 갱생의 여지가 있을까? 알 수 없다. 그런 살인자의 내면은 완전한 미지의 영역이다. 적어도 일반적인 감각을 가진 사람은 그런 자가 어떤 생각을 하고 사는지 이해할 수 없다.&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lt;span style=&quot;caret-color: auto; letter-spacing: 0px;&quot;&gt;&amp;nbsp;살인이라는 개념은 우리에게 친숙하니 자신이 살인자가 되는 상상을 한 번도 해보지 않은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일상생활에서 마주치는 짜증 나는 사람을 죽이고 싶다고 상상할 수도 있고 실수로 누군가를 죽이는 것을 상상할 수도 있고 미디어 컨텐츠에 등장하는 살인마에 이입해서 자신이 그 사람의 입장이었다면 어떻게 살인을 하고 시신을 처리했을지 생각해 볼 수도 있다. 나는 추리 소설을 많이 읽으니까 범인의 동기가 밝혀지는 대목에서는 내가 범인의 입장이었더라면 똑같이 살인을 했을지에 대해서 종종 상상해본다. 매우 납득이 가는 동기를 지닌 범인이 나오면 정말로 나라도 살인을 했을 것 같다고 결론 내릴 때도 있다. 예컨대 사랑하는 사람을 죽인 자에 대한 보복 살인은 쉽게 공감할 수 있다. 상실감과 공허함으로 삶에 대한 의욕은 반감될 것이고 살인자에 대한 증오가 그 자리를 채울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유족은 많은 경우 살인범이 누구인지도 모르거나 접근할 기회가 없거나 보복할 능력이 없으니 개인적 복수를 하고 싶어도 하지 못하겠지만, 추리소설에서처럼 번뜩이는 트릭이 떠오르고 그걸 실행할 충분한 기회도 주어진다면 범행의 유혹을 뿌리칠 수 있을지 장담하기 어렵다.&lt;/span&gt;&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lt;span style=&quot;caret-color: auto; letter-spacing: 0px;&quot;&gt;&amp;nbsp;하지만 이런 식으로 살인자에 이입할 수 있는 것은 기본적으로 폭력을 원하기 때문이기보다는 폭력에 거부감을 느끼기 때문인 것 같다. 상대가 사랑하는 사람을 앗아간 살인자라는 전제가 없다면 사람을 죽이고 싶다는 생각을 진심으로 하기는 쉽지 않다. 물론 우리가 언제나 죽어 마땅한 사람만 죽이고 싶어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우리는 종종 그렇게 큰 잘못을 범하지 않은, 또는 전적으로 무고한 사람에게도 악의나 폭력성을 느낀다. 하지만 그런 악의를 적극적으로 표출하는 사람이라도 되도록이면 살인 교사나 자살 유도 같은 간접적이고 손을 더럽히지 않는 방식으로 표출하고 싶어하는 것이 일반적일 터다. 현대 사회에서 직접 사람의 숨통을 끊는 것은 대체로 하고 싶지 않은, 역겹고 불쾌하며 고된 노동이다. 그것이 복수나 처벌 같은 적절한 응보라도 거부감이 드는데 무고한 이를 대상으로, 필요 이상으로 처참하게 죽여야 한다면 말할 것도 없다. &amp;lt;13계단&amp;gt;의 더블 주인공이라고 할 수 있는 교도관 난고 쇼지는 두 차례의 사형 집행 경험을 트라우마로 안고 살아간다. 버튼을 누르거나 사형수 목에 밧줄을 거는 매우 간접적인 작업을 여러 동료들과 분담해서 하는 환경이고, 상대가 극악무도한 흉악범이라는 사실이 자명함에도 사람을 죽이는 일에 끔찍한 부담을 느끼는 것이다. 누구나 그럴 것이다. 그런 한편 노인의 머리가 깨져 뇌가 튀어나오고 팔다리가 분리될 때까지 도끼를 휘두르고 싶어하는 범죄자가 있다. 그런 살인자에 갱생의 여지가 있을까? 쉽사리 대답하기 어려운 이유는 무엇이 사람을 그렇게 만들 수 있는지 상상하기조차 힘들기 때문이다. 언젠가부터 이 문제는, 비인간적일 정도로 이기적이고 사악하며 잔혹한 사람에 대해 경악하는 문제가 아닌 것 같다. 내 안의 윤리적 기준을 모두 잊고 이기심과 사악함을 극도로 끌어올려 본다고 하더라도 사람을 도륙 내고 싶지 않다. 그것보다는 편하게 살고 싶기 때문이다. 내가 운영하는 공장에서 일하던 노동자들이 잔혹하게 사망한다는 보고를 받고도 안전 설비를 도입하기 싫을 수는 있다. 이해할 수 있는 방식으로 이기적이고 사악하며 잔혹한 것은 그런 것이다. 현대인이 갈망하는 잔혹함은 통상 교묘하고 은밀한 잔혹함이다. 반면 무고한 사람들 여럿을 손수 쳐 죽인다는 식의 날것의 잔혹함은 불쾌하고 꺼림칙하다. 그런 행위를 하는 이들에게 이입할 여지는 없으며, 그런 범죄자들은 우리에게 완전한 타자로 다가온다. 그래서 한편으로는 이들을 괴물로 규정해서 빨리빨리 죽여 버리고 싶어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어떻게든 그들도 우리와 같은 사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버리기를 주저한다. 어느 쪽이든 이해할 수 없는 것을 이해해 보려는 노력이라 할 수 있다. 눈앞에서 치워버릴 대상으로든 망가진 동족으로든 분류해 보려는 것이다.&lt;/span&gt;&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하지만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폭력이 도처에서 벌어지고 있다. 말도 안 되는 이유로 길을 가던 행인을 피습해 죽음에 이르게 하거나 일가족을 도륙 내거나 연인을 살해하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연일 보도된다. 이런 종류의 범죄가 불러일으키는 소름 끼치는 인상은 정확히 이 불가해성에서 온다. 영화 &amp;lt;위키드&amp;gt;의 도입부에서 착한 마녀 글린다는 사악한 서쪽 마녀를 회상하며 이렇게 말한다. &lt;i&gt;사악함은 만들어지는 것일까요? 아니면 몇몇 이들은 그저 사악하게 태어나는 것일까요?&lt;/i&gt; 우리는 집안의 날벌레만큼이나 집요하게 발생하는 사악함의 기원을 모른다. 흉악범이 근간부터 우리와 다른 존재라고 말할 수 있다면 온라인 게임에서 괴물을 죽이듯 마음 편히 그들을 죽여 버릴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한편으로 그들은 우리와 같은 유년기를 보냈을 것이고, 우리처럼 아침 식사로 토스트를 먹을지 베이컨을 구울지 고민할 것이고, 연예인 사진을 들고 미용실에 가서 머리를 자를 것이고, 연인에게 이별 통보를 받고 연인의 일가족을 살해하기 전에는 평범하게 소개팅에서 만나 mbti 이야기를 했을 것이다. 게다가 꼭 범죄자가 아니더라도 우리가 영원히 이해할 수 없을 일군의 사람들이 세상에는 늘 존재한다. 매일 자진해서 한여름 땡볕에 나와 누구도 반기지 않는 교회 물티슈를 나누어주는 사람들도 있고 지구가 평평하다고 주장하는 학회에서 발표를 하기 위해 하루종일 자료조사를 하는 사람들도 있고 평생 폐지를 주워 모은 몇 푼 안 되는 돈을 싹싹 긁어 기부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런 행동들을 할 때 그 사람들은 마치 외계인 같다. 하지만 그들은 살아 있는 내내 그런 행동만 하는 것은 아니다. 어디 다른 곳에서는 특이한 사람들은 하지 않을 것 같고, 평범한 보통 사람들이 할 것 같은 일들을 또 하러 갈 것이다. 인간의 가능성이 다양한 것인지 다양한 인간들이 태어나는 것인지 우리는 알 수 없을 것이다.&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amp;lt;13계단&amp;gt;에서 주인공 미카미 준이치는 운 나쁘게 상해치사죄로 전과자가 되었지만 작품이 대체로 그의 입장에서 서술되어 있어서 독자가 미카미에게 이입하기는 매우 쉽다. 그는 그저 우리처럼 평범한 사람으로 보인다. 그런데 작품이 종막으로 치달을 즈음 예상치 못한 전개가 나타난다. 미카미와 난고가 사형수의 무죄를 증명하기 위한 핵심 증거를 찾아냈는데, 그 증거가 다름 아닌 미카미를 범인으로 지목하는 증거였던 것이다. 이 증거는 결국 미카미를 범죄자로 몰아 사형당하게 하려는 피해자 유족의 술수로 밝혀진다. 그러나 나는 이 대목에서 한순간 멈칫했다. 착하고 온순하게만 보였던 미카미에 대한 묘사가 사실은 모두 서술 트릭이었고 노부부를 도륙 낸 잔혹한 범죄자의 정체는 정말로 미카미였던 것이 아닌가 하는 가당찮은 의심을 짧은 순간이나마 하게 되었던 것이다. 물론 작품의 전개를 찬찬히 생각해 보면 그것이 사실일 여지는 전혀 없었다. 아마 그런 식으로 뒤통수를 치는 소설 문법에 너무 익숙해져 막무가내로 의심부터 하는 습관이 만들어졌기 때문에 얼토당토않은 생각을 하게 된 걸 것이다. 그러나 그 순간, 어떤 사람의 입장에서 쓴 책을 몇백 페이지나 읽어 놓고도 그가 끔찍한 흉악 살인자가 아니라는 확신을 가질 수 없었음을 깨달았다. 타인을 안다는 것은 인간이 할 수 있는 착각 중 가장 유서 깊고도 중대한 착각인 듯하다.&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법률은 어느 정도의 인간학을 전제한다. 하지만 우리는 전혀 모르는 사람들과 살아가고 있다. 물론 세상에 정의가 구현되지 않고 법의 그물에 구멍이 가득한 것은 단지 그 이유만은 아니겠지만. AI의 내부가 블랙박스라고 사람들이 놀랍다는 듯 아무리 떠들어 대도 더한 블랙박스는 역시 인간인 것 같다. 언젠가 뇌과학이나 범죄심리학 등등 우리가 가진 시시한 도구 중 하나가 이런 문제들에 답을 찾아다 줄지는 전혀 모르겠다.&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그래도 진실을 찾는 장르로서 추리물은 좋다. 우리가 진실을 알 수 없다고 해서 진실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은 아니니까.&lt;/p&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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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lt;/p&gt;</description>
      <author>니라잡채양념</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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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Mon, 21 Jul 2025 17:56:36 +0900</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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